이종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변한 상황에서 옛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 글을 써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얼마나 더 견뎌줄지, 아니 머지않아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조급한 마음이기도 하다.
1950~60년대에 갯골을 터전으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글로나마 그 추억을 남기고 싶고, 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당시로 돌아간다면 현재 신현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논부터 하중동 앞에 있는 논들은 논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염전을 제외한 주변이 모두 갯벌이었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갯벌을 개간하기 시작해서 현재 너른 들이 만들어졌다. 일부 남아있던 갯벌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논으로 만들어서 쌀을 생산하는 농지가 되었다.
갯벌을 논으로 개간을 해야 했던 것은 절대빈곤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바닥만 한 공간만 있어도 논을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다. 지금처럼 중장비가 전무했던 당시 삽, 가래, 그리고 손수레가 전부였다. 운반수단이 없었기에 지게나 들것(당가)을 이용해서 순전히 인력으로 개간을 했다. 그렇게 둑을 쌓아 갯물은 막았다고 당장 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벼를 재배할 수 있게 된다. 태곳적부터 바닷물이 들었던 곳인지라 토양에 배인 염분을 완전히 우려내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늘만 바라보면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염도가 높은 토양에서도 자랄 수 있는 것을 심어야 했다. 그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물막이를 한 갯논에 피(稗)를 심는 것이었다. 지금은 동물의 사료로도 사용할 수 없는 풀이지만 당시는 그것을 구황작물로 심었다. 벼농사를 지을 때 반드시 등장하는 잡초로 농민들이 가장 성가셔 하는 풀인 데 그것이라도 생산해야 했을 만큼 절박했다. 오죽했으면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얼굴 같다.”는 말이 생겼을까.
어린 시절 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참했던 기억이다.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수레를 밀었고 삽질도 했다.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들이 일하는 곳에 따라가서 뭔가는 거들어야 했던 기억이다. 땅을 일구는 현장에서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다해 손을 보탰다.
개간은 갯벌이 사라지기 시작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식량이 절박했던 상황에서 쌀을 생산할 수 있다면 갯벌이 사라지는 것이 결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논이 만들어주는 자연경관과 습지로서의 기능은 갯벌은 잃어버렸지만 나름 대신할 수 있었다. 하여, 너른 들판이 만들어준 경관은 나에게 언제나 걷고 싶은 곳이 되어주었다.
나의 성장기에는 그 들길을 걸으며 사고했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그 들길을 걸으며 자신을 달랬다. 삶의 터전을 옮겨간 후에도 종종 찾아서 걸었다. 언제 찾아도 거부하지 않고 나를 반겨주었기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찾았고 기쁜 일이 있어도 찾았다. 그때마다 그 들녘은 나를 편안하게 반겨주었다.
그런데 갯골도, 들녘도 자취만 남아있던 염전까지 모두 사라져가는 것을 보니 과거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 같은 아쉬움이다. 그래도 그곳을 찾으면 옛 추억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하나씩 둘씩 모두 생각이 났었는데 말이다. 메뚜기를 잡았고, 갯골에서는 게나 망둥이, 가을엔 참게, 여름에 온갖 잡어를 잡아서 절대 부족했던 단백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갯골 주변에서 자라는 풀까지 먹을거리가 되어주었다. 이른 봄날이면 갯냉이와 갈대뿌리까지 아이들에게는 허기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봄날, 갯벌에 찾아들던 수많은 물새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도요새를 비롯해서 제비갈매기의 산란 처였다. 가을날 찾아오던 오리들에게는 갯벌과 갯골이 쉼터였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연명하기조차 힘들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영양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갯골과 갯벌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절대빈곤 중에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생명의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젠 배가 부르다고, 이젠 더 이상 갯골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봐야 타산이 맞지 않는다. 염전은 벌써 사라지고 말았다. 배고픈 시대도 아니고, 땀을 흘려 애써 소금을 만드는 일도 경제적 이익 적으니 그곳을 배부른 사람들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명분은 폐염전 부지를 활용하는 것이고, 일자리를 만들어서 시민들의 소득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며, 더하여 세수도 확보할 수 있다는 현실론이다.
그러나 더 큰 것을 잃는다는 생각은 언제나 뒷전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찾아들 수 있는 공간, 마음에 남겨진 추억을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면 갯골은 지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서 모든 시민의 고향을 앗아가려는 발상은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 아닌지.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미 개인 소유이기에 소유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땅이란 공적인 개념, 특별히 갯골과 그 주변의 공간만이라도 공적인 것으로 남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