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 잃어버린 갯골 습지 (6) - 11월 21일 1147호 5면 ☜ 링크 연결
‘소래염전’은 일제 말기인 1935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해서 1937년 완성되었다.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서해안 바닷물을 이용한 제염은 일본으로서도 매력이 있었고, 수탈품목으로 추가시켜 가져가기 위해서 내륙으로 갯골이 발달한 포리, 방산리, 하중리 그리고 장곡리 앞에 펼쳐져있는 갯벌에 염전을 조성했다. 일반적으로 소래염전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지금의 인천 소래가 아니라 부천군 소래면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소래염전은 곧 포리염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일본을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 1932년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은 만주를 지배하면서 한편으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1945년 패전할 때까지 전쟁을 이어갔다. 만주를 점령한 다음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진 일본이 한반도를 대륙을 통치할 수 있는 거점으로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전쟁과 자국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조달창으로 생각했다. 또한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를 예측한 일본은 조선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만큼 한반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소래염전이 완공되는 해와 수인선 개통, 그리고 중일전쟁을 전면적으로 일으킨 1937년인 것이 묘하게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래염전이 완공되던 해인 1937년 7월 11일 수인선(협궤)이 개통되었다. 염전이 완공되면서 소금을 실어갈 수 있는 철도가 필요했고, 소금을 실어낼 수 있는 야적장이 필요했다. 그러한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현 인천의 소래역이다. 한편 수려선(수원-여주)은 수인선보다 7년이나 빠른 1930년 완공하여 이천과 여주의 쌀을 수탈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수원에 모아진 쌀은 다시 경부선과 호남선, 군산선으로 갈아타고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실어갔다.
수인선이 완성되면서 수려선과 연결되었고, 여주와 이천의 쌀과 함께 소래염전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소금을 인천항에서 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소래염전은 일본의 목적에 따라서 조성되었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값싼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비교적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입지조건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소자본을 투자해서 필요한 양질의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유리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성된 소래염전은 해방 이후 그대로 염전의 기능을 했다. 소래염전은 남한에서 군자염전과 함께 가장 큰 염전으로 소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다시 6.25사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현실에서 염전은 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휴전과 함께 당장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현실에서 일터를 찾아도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었던 당시 염전은 힘들지만 귀한 일터였다.
인력은 많지만 일거리가 없었던 당시, 염전은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마저도 염전의 특성상 봄부터 가을까지만 일할 수 있는 곳이지만 경쟁이 심했다. 그러니 인건비는 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염전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그것은 산업기반이 전무했던 전후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런가 하면 절박한 현실에서 숨겨진 우리의 모습도 있다. 소금을 몰래 빼돌려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공공연히 많았다. 모두가 알지만 절박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 눈감아주었을 것이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소금을 사다가 먹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집에서 필요한 만큼은 나눴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공급될 수 없게 되자 남한에는 소금이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금을 전매청이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소금 공급을 위한 염전을 남해와 서해안에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이번에는 과잉공급이 되면서 소금 값이 하락하게 됨으로 전매제도도 폐지했다. 결과적으로 염전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요즘으로 말하면 공사(公社)와 같은 기능을 하는 회사를 만들어서 관리하게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국영기업체인 대한염업주식회사가 1963년에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래염전은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전매청이 직접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국영기업체는 주인 없는 회사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염전은 운영하면 할수록 적자와 생산력 저하가 이어졌으니, 계속 유지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국가가 계속 운영하는 것은 어려웠고, 1971년에 민영화되었다. 그 후 1992년 주식회사 성담으로 이름을 바꾸어 소금 생산을 계속했지만 경제성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결국 1996년 7월 소래염전은 문을 닫았고 말았다.
소래염전은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남한에 있는 염전의 중심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주안, 남동, 군자, 소래 등이 소금을 생산하는 기지였기 때문이다. 즉 일제가 만든 염전이 북한 평안남도 용강군 광량만과 평안북도 용천군 등 여러 지역에 염전을 조성해서 소금을 생산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분단국가가 되면서 남한은 소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입을 하다가 전남 신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염전을 조성하게 되었다. 문제는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지 않은 채 염전을 만든 결과 과잉생산으로 인해 염업이 사양산업이 되고 말았다.
많이 알려진 신안 증도의 태평염전도 6.25사변이 휴전되면서 1950년대 후반기에 조성되었다. 별다른 산업 인프라를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염전은 새로운 일터였다. 하지만 이내 과잉생산으로 인한 소금 값 하락은 제염산업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소래염전도 1996년 이후 방치상태로 있다가 소유주인 주식회사 성담이 골프장으로 개발하여 2014년 문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골프장은 갯골을 중심으로 남쪽인 장곡동 지역에 개발했다. 반면 갯골 북쪽에 해당하는 포동쪽은 아직도 방치된 상태이다. 이렇게 소래염전은 만든 지 70여년 만에 또 다른 필요에 의해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