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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칼럼] 잃어버린 갯골 습지 (8)

기사입력 2026-02-26 18:21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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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 잃어버린 갯골 습지 (7) - 1월 9일 1153호 ☜

  필자가 자란 곳은 포리(포동)이다. 그곳에서 내 어린 성장기를 보냈고, 포리초등학교는 나를 길러준 곳이며, 그 시절 많은 추억을 내게 남겨주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난 후 포리초등학교는 주변 마을의 인구감소와 함께 취학아동이 줄어들면서 한 때는 폐교 위기까지 갔었다. 하지만 필자가 학교에 다녔던 1960년대는 한 학급에 5~60명씩 두 개 반과 2부제 수업을 해야만 겨우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이 많았고 학교 시설은 태부족했다.
  해방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북녘으로부터 월남한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인구는 급증했다. 6.25사변 이후에는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출생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1950년 말부터 취학아동이 급격하게 늘었다. 국민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온전하게 시킬 수 있는 교육 여건은 기대할 수 없는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소래면 내 초등학교는 소래초등학교(1920), 도창초등학교(1938)뿐이었다. 계수초등학교는 해방 후인 1947년, 포리초등학교는 1949년에 소래초등학교 분교장으로 시작하여 1953년에 포리초등학교로 승격되었다. 
  취학아동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데 정작 학교와 교실, 교사들이 수급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생들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모든 것이 녹록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써는 그래도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은 부럽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현실은 참담한 정도였다.
  포리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과정도 학군에 속한 마을들의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초등학교가 절실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9월 1일 소래초등학교 포리분교장으로 설립되기 전까지는 이 지역의 아이들은 소래초등학교까지 다녀야 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자녀를 초등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가정이 많았기 때문에 소래초등학교까지 학교를 갈 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교육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복 있는 자녀였다.
  해방 이후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에 자녀 교육이 절실했던 부모들의 열망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에 보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초등학교조차 월사금(등록금)을 내야만 다닐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적은 돈이지만 그것을 제때 납부할 수 있는 가정은 결코 많지 않았다. 또한 학교가 멀리 있으니 통학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갯골생태공원 주변에 있었던 학교는 포리초등학교와 같은 해인 1949년 군자초등학교 장곡분교장으로 개설된 장곡초등학교 등 두 개뿐 이었다.
  이번 글부터는 초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것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 공유하고자 한다. 특별히 갯골을 중심으로 하는 추억에 담긴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겨 나누고자 한다. 그 기억들은 단지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과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온 요소들로 작용했던 것이기 때문에 비록 잊힌 것일지라도 현재의 의미를 더하게 하고, 기억되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를 통해서 있는 것이기에 과거를 잊으면 현재의 의미가 단조롭게 된다. 물론 때로는 차라리 잊고 싶은 것들도 있다. 그것이 아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것들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조차 현재의 의미를 더하게 하기 때문이고, 혹여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와 문화의 주인공인 사람은 잊힌 것들을 찾아내고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픈 것이기 때문에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없는 현재는 온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
  턱없이 부족한 시설이었고 때로는 선생님이 없어서 다른 반 선생님이 교실을 오가며 가르침을 받아야 했지만, 그곳에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있고, 우리 사회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비록 어려운 환경과 열악한 교육시설이었지만 당시 500여 명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미래를 꿈꾸게 하는 곳이었다. 또한 유치원이라고는 있는지도 모르는 소외된 지역이었던 곳이기에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사회를 경험하고 만들어가는 기회를 얻어 경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가난했던 우리의 현실은 아이들을 초등학교마저도 보낼 수 없는 가정이 있었고, 학교에 보냈지만 동생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있는 아이들은 동생까지 데리고 학교에 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렇게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던 아이들은 다행이었다. 그러니 학교에 다니지만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 결과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글을 깨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는 다녔지만 한글조차 읽고 쓰기가 되지 않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다.
  또한 학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역 사회에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교실이 부족했고 교보재는 전무했다. 운동장에서 놀 수 있는 공 하나가 없었다. 운동회 날이면 운동화는 그만두고 맨발로 뛰어야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다른 학교로 육상경기를 가는 아이들도 신발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연습했다. 그러니 학교 시설은 어떠했겠는가?
  그마저도 우리 정부가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없었고, 미군의 지원으로 목조건물이지만 지어진 학교 건물이다. 교실바닥에 깔린 마루는 아이들의 손길로 닦고 문질러서 겨우 유지되고 있었지만 겨울이면 옹이가 빠진 구멍이나 벌어진 이음새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학교가 거기에 있었기에 아침 등교시간이면 아이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부터 모여들어 왁자지껄했다. 아이들의 소리가 갯골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지금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려고 해도 듣기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그 많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관리자 (sjn4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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